김남수(金南秀, 1350∼1423)
여말선초의 무신.
본관 : 연안(延安)
시호 : 장양(莊襄)
[가족사항]
고조부 : 밀직부사(密直副使) 김대의(金大義)
증조부 : 호군(護軍) 김실(金實)
조부 : 정순대부(靖順大夫) 대호군(大護軍) 김승석(金勝碩)
부 :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을진(金乙珍)
백부 :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전서(工曹判書) 김선(金善) [연안김씨 공부전서공파 시조]
형 : 개국공신(開國功臣) 추충협찬정난정사공신(推忠協贊靖難定社功臣)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연성군(延城君) 공경공(恭頃公) 김로(金輅)
부인 :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길씨(海平吉氏)
아들 :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행판중추원사(行判中樞院事) 증(贈)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春秋館事) 연산군(延山君) 양효공(襄孝公) 김효성(金孝誠), 김효충(金孝忠)
손자 : 김처인(金處仁), 김처의(金處義), 김처례(金處禮), 김처지(金處智), 김처신(金處信), 김처정(金處貞)
※ 둘째 손자 김처의는 정난공신이었으나 반역죄로 사형당했고, 동생 김처례는 형 처의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관노가 되었다. 다만, 반역 모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 동생 김처지·김처정 역시 연좌되어 관노가 되었다.
[설명]
1350년(충정왕 2)에 태어나 고려 공민왕 조에 현화사 진전직(玄化寺眞展直)으로 관직에 나간 후 소부윤(少府尹)·홍주 목사(洪州牧使)·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태조 조에는 순제등처병마사(蓴堤等處兵馬使), 이조·예조·병조·형조의 전서(典書),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02년(태종 2)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로 재직중에 재물을 탐하여 백성들을 소요(騷擾)한다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1405년 태종이 그와 조온(趙溫)·조연(趙涓) 등을 거느리고 활쏘기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배형은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
1406년 2월,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복직하여 8월에 좌군 도총제에 제수되었다.
1407년 7월,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김희선(金希善) 등과 백관을 거느리고 민무구·민무질 등을 국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12월에는 중군 도총제로 충좌 시위사 상호군(忠佐侍衛司上護軍)을 겸임하였다.
1408년 2월, 태상왕으로 물러난 태조 이성계가 그의 집에서 피병(避病 : 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것)하였다.
1409년 10월, 명나라의 요청에 따른 군마의 진헌을 위한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이 설치되자, 이천우(李天祐)·설미수(卨眉壽)·윤사수(尹思修)와 함께 제조(提調)에 임명되었고, 이어 11개의 도에 도절제사가 설치되자 충청도 도절제사에 제수되었다.
1410년 6월, 여진족이 동북면을 침략하자 길주도 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가 되었다가 곧 들어와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
1411년 12월, 순금사에 하옥된 권희달(權希達)을 임의로 들어가서 방문하였다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용서하였다.
1412년 사복시 겸 판사(司僕寺兼判事)를 역임하였다가 다시 판공안부사에 제수되었고 삼군별시위(三軍別侍衛)·응양위절도사(鷹揚衛節度使)·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 등이 설치되면서, 이흥발(李興發)과 함께 별시위 좌일번 절제사(別侍衛左一番節制使)가 되었다.
1413년 12월, 지의정부사 겸 판사복시사(知議政府事兼判司僕寺事)에 제수되었다.
1414년(태종 14) 8월,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다.
1419년(세종 1) 5월, 수년 전 사복시제조로서 살곶이목장[箭串牧場]의 땅을 훔쳐 경작한 사실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의 관직이 파면되어 온수(溫水)로 귀양보내졌으나 8월에 태종의 교지로 귀환하였다.
1421년 1월, 권지 성균 학유(權知成均學諭) 이형기(李馨期)는 본래 아전 출신으로 가문을 숨기고 사족(士族)을 사칭하였는데 과거 급제 후 허위 사실을 밝혀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는 이어 이형기를 보증하여 천거한 그를 처벌하기를 건의하였으나 세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23년(세종 5) 1월,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의 사제(私第)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장양(적에서 이기고 뜻이 강한 것을 '장', 전쟁에서 공로가 있는 것을 '양')의 시호를 받았다.
[성품]
젊을 때부터 빼어나게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어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과실이 있으면, 면전에서 꾸짖고 꺼리는 것이 없었다. 항상 아들 김효성 등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서 임금을 만나 직위가 1품에 올랐으며, 너도 또한 은혜를 입어 이름이 사판(仕版 : 관리 명부)에 올랐으니, 은혜를 갚기가 어렵겠다.” 라고 하였다. 기해년에 아들 김효성이 대마도 정벌에 나가니, 남수가 떠나 보내는 말로 "병든 아비의 일은 근심하지 말고 마땅히 노력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少有雄勇之名, 屢立戰功, 同列有過, 面罵無忌。 常戒子孝誠等曰: "予以不才, 遭遇聖明, 位躋一品, 爾亦蒙恩, 登名仕版, 難以報效。" 歲在己亥, 孝誠赴征對馬島, 南秀臨別語曰: "勿以病父爲憂, 要當努力報國。"
-『세종실록』19권 계묘년(1423) 1월 17일(기해) 김남수 졸기 中 -
[참고자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연안김씨대동보(延安金氏大同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