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례(高鳳禮, ?~1411)
여말선초의 무신.
마지막 탐라성주.
본관 : 제주(濟州)
자 : 백공(伯恭)
[가족사항]
고조부 : 탐라성주(耽羅星主) 고인단(高仁旦) [제주고씨 성주공파 시조]
증조부 : 탐라성주 서도 부천호(西道副千戶) 고석(高碩)
조부 : 탐라성주 고순원(高順元)
부 : 탐라성주 고신걸(高臣傑, 또는 信傑) [제주고씨 전서공파 시조]
형 : 고봉인(高鳳仁), 고봉의(高鳳義)
동생 : 제주 서도 정해진(濟州西道靜海鎭) 도사수(都司守) 상호군(上護軍) 고봉지(高鳳智)
부인 : 군부인(郡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
장인 : 탐라왕자(耽羅王子) 문충걸(文忠傑)
아들 :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 고상온(高尙溫)
[설명]
1386년(우왕 12) 제주인들이 여러번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회유하려는 목적에서 고려 조정은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 대호군 진여의(陳如儀)를 파견하였다. 이듬해 4월, 이들을 따라 부친 고신걸과 함께 개경으로 와 입조하였다. 이때부터 제주가 고려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입조 후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1388년(우왕 14) 군기소윤(軍器少尹)으로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에 제수되어 제주도로 돌아왔다.
1394년(태조 3) 7월, 말 1백 필을 바치고 조선 조정으로부터 쌀 1백 섬을 하사받았다.
1402년(태종 2) 탐라성주 재직시에 왕자 문충세(文忠世)와 함께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라는 호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줄 것을 청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다.
1407년 5월,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제수되었다.
1410년 5월,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로 경차관(敬差官) 조원(趙源)과 함께 말 1백 필을 바치고 따로 양마(良馬) 6필을 바쳐 쌀 1백 석을 하사받았다.
1411년(태종 11) 3월, 쌀 20석을 하사받았다.
5월, 아내가 사망하자 태종은 쌀 30석과 종이 1백 권, 관곽(棺槨)을 하사하고 사람을 보내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7월, 쌀과 콩 30석을 하사받았다.
8월, 장남인 상온에게 자신의 세직(世職)인 제주 도주관 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승습시켜 줄 것을 청하여 승계시켰다.
11월, 구리로 된 화로[銅鑪]를 바쳐 쌀 20석을 하사받았고 29일에 한성에서 사망하였다. 태종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 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며 양전(兩殿 : 임금과 왕비)이 모두 사제(賜祭)하고,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
[참고자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제주고씨세보(濟州髙氏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