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사인물

한창수

khf666666 2025. 5. 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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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수(韓昌壽, 1365∼144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 안변(청주한씨 예빈윤공계)

 

초명 : 한장수(韓長壽)

다른 이름 : 한창수(韓昌守)

 

시호 : 양정(良靖)

 

[가족사항]

 

고조부 : 예빈윤(禮賓尹) 한연(韓連) [청주한씨 예빈윤공계 시조]

증조부 : 증 순성적덕좌명보리공신(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 판호조사(判戶曹事) 안원군(安原君) 한유(韓裕)
조부 : 증 적선육경동덕찬화익조공신(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 겸 판이조사(判吏曹事) 안천부원군 한규인(韓珪仁)
부 : 한경 
모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
외조부 : 증 병의육덕보조공신(秉義毓德輔祚功臣) 숭정대부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형조사(判刑曹事) 신원려(申元麗)

※ 다른 기록과는 달리 어떤 영문인지 장인의 이름이 『청주한씨제칠교대동족보』에는 신윤의(申允義)로 기록되어 있다.

백부 : 도렴령 동정(都染領同正) 한정간(韓貞幹), 증 숭록대부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용(韓龍), 숭록대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한시대(韓時大, 또는 始大), 영문하(領門下) 좌정승(左政丞) 한대공(韓大公)
숙부 : 한용(韓用)
동복누이 : 승인순성신의고황후(承仁順聖神懿高皇后) [조선 태조의 정비/정종과 태종의 모후]

※ 동복누이 신의고황후 한씨 외에 4명의 누이가 더 있으나 동복인지 이복인지는 알 수 없다.

동복형제 : 가선대부(嘉善大夫) 안산군(安山君) 한성기(韓成己),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군(安川君) 양정공(良靖公) 한검(韓劍, 또는 釰)
이복형제 : 증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한금강(韓金剛),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호정공(胡靖公) 한융전(韓隆田)

아들 : 한기(韓起), 한원(韓垣), 한의정(韓義正)

※ 『세종실록』한창수의 졸기에는 후사가 없다(無後)라고 적혀있으나 『청주한씨제칠교대동족보』에는 세명의 아들이 전하는데 양자인지는 알 수 없다.

 

[설명]

 

1365년(공민왕 14) 함길도 안변에서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의왕후의 동생이어서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 총제(摠制)를 역임하였다.
1405년 5월, 안원군(安原君)에 책봉되었다.
1408년 11월, 태종이 명나라 사신 접대 후 태평관(太平館)에서 돌아올 때, 사신의 수행원이 말을 달려 행차에 뛰어들어 임금의 거가가 놀라 움직인 일로 내금위 절제사(內禁衛節制使)로서 제대로 호위하지 못해 순금사에 하옥되었다가 3일 만에 석방되었다.
1409년 10월, 경기좌도 도절제사(京畿左道都節制使)에 제수되었다.
1412년 5월, 중군총제(中軍摠制)에 제수되었다.
1415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1416년(태종 16) 2월, 지돈령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7월에 귀국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었으나 상왕이었던 태종이 사은사는 반드시 친척을 보내야 하나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이 명나라 태감 황엄(黃儼)과 알고 지내는 사이니 심온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교체되었다.
12월, 영접사(迎接使)로 황주(黃州)로 파견되어 명나라 사신 태감 황엄(黃儼)을 영접하였다.
1419년 9월, 의주(義州)로 파견되어 명나라 사신을 위문하였고 10월에는 상왕(태종)이 머물고 있는 수강궁에서 향과 소문(疏文)을 받들고 가서 흥천사(興天寺)에 화엄법석(華嚴法席)을 차렸다.
1420년 4월, 안주(安州)로 파견되어 명나라 사신을 위문하였고 7월에 왕명으로 흥덕사(興德寺)로 가서 사망한 세종의 모친인 원경왕후 민씨의 초재(初齋)를 행하였다.
1421년 7월, 특별히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제수되었다.
1422년 1월에 왕명으로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제사를 지냈으며, 6월에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9월에 귀국하였다.
1423년 4월, 명나라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선위사(宣慰使)로 평양에 파견되었다.
1425년 9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 귀국하였다.
1427년 5월, 상참이후 신하들이 필요한 일을 왕에게 아뢰는 조계(朝啓)를 통해 윤인부(尹仁富)·최습(崔濕)·이산(李山)의 벼슬을 함부로 승진시켜 외척 대신(外戚大臣)으로서 의리에 어긋난다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28년 4월, 숭록대부(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1429년 7월, 선위사(宣慰使)로 유후사(留後司)에 파견되었다.
1432년 12월, 다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1436년 1월, 원상(元庠)·오승(吳陞)과 함께 70세가 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고 이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40년(세종 22) 11월 29일, 76세의 나이로 사망였고 양정(성품이 온화하고 호락(好樂)함이 '양', 유직(柔直)하고 끝을 잘 맺은 것을 '정')의 시호를 받았다.

 

[참고자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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