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도(崔文度, 1292~134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 : 전주
자 : 희민(羲民)
호 : 춘헌(春軒)
시호 : 양경(良敬)
[가족사항]
고조부 : 봉어(奉御) 최윤칭(崔允偁)
증조부 : 호부상서(戶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소(崔佋)
조부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최비일(崔毗一)
부 :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광양군(光陽君)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
외조부 :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동수국사(同修國史) 김훤(金晅)
매형 : 만호(萬戶) 밀직부사(密直副使) 권렴(權謙)
장인 : 나익희
※ 자녀들은 모두 첫째부인인 김씨의 소생이나 후처인 나익희의 딸인 나씨부인을 자녀들이 섬김에 있어 계모인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지극하였다고 한다.
아들 : 최사검(崔思儉)
사위 : 중정대부(中正大夫) 좌간의대부(左司議大夫)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정포(鄭誧) [상락군개국공 충렬공 김방경의 외증손], 증(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행(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민선(閔璿)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 문인공 민지의 손자/조선 태조의 4남 회안대군 이방간의 장인/고려 석탄 이존오의 장인]
[설명]
일찍이 무관(武官)으로 출세하여 부친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여, 몽골어과 글에 능통하여 원나라 무장들과 교유하였으나 성리학에 통달하여 고려로 귀국 후에 고려의 자제들이 공부하지 않음을 걱정하여 성리학을 강습하였다고 한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티베트(토번)에 유배되었을 때 소식을 듣고 달려가 아버지를 만나 함께 임조(臨洮 : 중국 감숙성 정서시 임조현)와 농서(隴西 : 중국 감숙성 정서시 농서현)까지 시종하였다.
※『고려사』 권108 「최성지열전」에서는 충선왕이 토번으로 유배되었을 때 부친 최성지가 충선왕을 따라 원에 있었으나 도망가서 나타나지 않아 배은망덕하게 몸을 보전하기 위해 도피하여 군신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며 당시 사람들이 비난했다고 기록했으나 「최성지묘지명」에는 최문도가 부친 최성지와 함께 감숙성 임조와 농서까지 갔지만 승려 원명화상(圓明和尙)의 반란으로 길이 막혀 임조 근처에서 반년을 머물다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로 귀국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지냈고 명을 받고 평양과 쌍성총관부에도 머물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전(前) 전법판서로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煦 : 영가부원군 문정공 권부의 아들인 권재로 충선왕의 양자가 되어 왕씨 성과 후의 이름을 하사받음)와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한편, 성리학을 접한 그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유교적 장례법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 가묘(家廟)를 세워 살아계신 것처럼 잘 섬겼다고 한다.
1345년(충목왕 1) 6월 1일,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참리(都僉議叅理)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나 54세로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가]
원(元) 조정에서 숙위하며 염락(濂洛 : 북송의 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정호(程顥) 형제를 말함)의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서적을 즐겨 읽으며 부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였다. 성품은 따뜻하고 선량하여 사람들은 한 번도 그가 갑자기 성을 내거나 기뻐 날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고려사』열전 권제21 내용 中 -
봄날의 햇살처럼 온화하고 맑으며, 가을 물결처럼 잔잔하여 비록 종이나 첩이라 할지라도 그가 급하게 화를 내거나 갑자기 기뻐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최문도묘지명(崔文度墓誌銘)』내용 中 -
[참고자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익재집(益齋集)』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