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방(崔繼芳, 1045~1116)
고려 전기의 문신·문벌귀족.
본관 : 수주(水州 : 경기도 수원)
자 : 복시(復時)
시호 : 화순(和順)
[가족사항]
고조부 : 증(贈) 태위(太尉) 수사공(守司空) 최융예(崔融藝, 崔融銳)
증조부 :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충좌리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推忠佐理同德盡郞衛主匡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태자태사(太子太師) 청하현 개국백(淸河縣開國伯) 정숙공(貞肅公) 최사위(崔士威)
조부 : 어사중승(御史中丞) 최충공(崔忠恭)
부 : 증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행 시상서공부원외랑(試尙書工部員外郞) 최유서(崔惟恕)
모 :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고려 숙종의 비 명의왕태후의 이모]
숙부 :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유락(崔惟諾),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 최수신(崔壽神)
외조부 : 중추원사(中樞院事) 병부상서(兵部尙書) 의경공(毅敬公) 김원황(金元晃) [고려 숙종의 비 명의왕태후의 외조부/광국동덕익성공신 중서령 낙랑공 김경용의 부친]
부인 : 귀성군대부인(歸城郡大夫人)
장인 : 합문지후(閤門祗候) 민령(閔寧)
동생 : 현화사(玄化寺) 승통(僧統) 상지(尙之), 공부상서(工部尙書) 삼사사(三司使) 최지(崔贄), 대부시주부(大府寺主簿) 최유(崔愈)
매부 : 호부상서 겸 태자첨사(戶部尙書兼太子詹事) 김항(金沆)
아들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특진(特進) 검교대위(檢校大尉)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문간공(文簡公) 최함(崔諴), 관오(觀奧)
[설명]
1045년(정종 11)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반드시 태사의 빛나는 이름을 이을 것이라 하여 이름을 계방(繼芳)이라고 지었다.
처음에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해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동궁에 들어가 당시 왕태자였던 순종(順宗)을 여러 해 동안 모셨다.
1083년 순종이 즉위하자 그 공으로 내신(內臣)이 되었다.
1095년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명의왕태후의 인척인 관계로 총애 받았는데 왕의 모든 공진(供進)과 선식(膳食)을 관장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짐이 아무개의 충성됨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그로 하여금 짐이 먹는 것을 맡아 감독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안에서 공을 불러, “임금께서 명한 것이니 공은 삼가야 할 것이다. 나도 역시 공의 충성됨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上謂左右曰朕知某之忠故使監朕之所食皇后自內召公曰上之所命公其愼之吾亦恃公之忠ㅁ
-『최계방묘지명』내용 中 -
1103년(숙종 8) 요(遼)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하는 사신으로 다녀왔다.
1109년(예종 4) 1월, 왕의 동생인 왕보(王俌)를 대방공(帶方公)으로 책봉하는 연회에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참여했다. 연회가 새벽이 되서야 끝이 났는데 왕명으로 술에 취하여 그가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재(李載)는 지금 나라에 변고가 많아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데 여러 차례 잔치를 벌여 춤까지 추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왕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1월에는 간의대부 이재·김연(金緣)과 함께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기습을 받아 패전한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을 문책할 것을 주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111년 3월,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兼三司使)에 제수되었다.
1112년 2월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9월에는 검교 사공 추밀원사(檢校司空樞密院使)에 제수되었다.
1113년 7월, 수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守司空兵部尙書參知政事)에 제수되고 12월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柱國)에 올라 치사하였다.
1116년(예종 11) 6월,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화순의 시호가 내려졌다.
[성품]
공은 사람됨이 부드럽고 부지런하며, 검소하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는데 입는 옷이나 신는 신발은 가난한 선비보다도 못하였다.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겨 노래자(老萊子 :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효자)의 풍모가 있었다. 관직에 임하여 일을 수행할 때는 능히 마음을 다하고, 어렵거나 쉽다고 하여 그 절의를 바꾸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하여서는 검소하여 법도가 있었고, 이해와 욕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실로 가히 맑은 사람이요 군자라고 할 만하다.
-『최계방묘지명』내용 中 -
[참고자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