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閔瑛, 1075~1150)
고려 전기의 무신.
본관 : 여흥(驪興)
[가족사항]
증조부 :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대자소사(兼大子少師) 민가거(閔可擧)
조부 : 위위경 지삼사사(衛尉卿知三司事) 민창경(閔昌京)
부 :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효후(閔孝侯)
모 :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외조부 :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김상빈(金尙賓)
형 :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 행(行) 좌사낭중 지제고(左司郎中知制誥) 민수(閔脩)
장인 : 호부영사동정(戶部令史同正) 홍뢰(洪賴)
아들 : 등사랑 직사관(登仕郞直史館) 민이함(閔利諴), 등사랑 양온서령(良醞署令) 민광문(閔光文), 지공주사판관(知公州事判官) 민ㅁ화(閔ㅁ和), 양온사동정(良醞史同正) 민ㅁ수(閔ㅁ秀)
사위 : 내시 대부소경 태자문학(內侍大府少卿太子文學) 김거실(金居實)
[설명]
아버지가 동계병마판관(東界兵馬判官)으로 재직중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하자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였다. 마침 여진 정벌을 위해 윤관(尹瓘)의 건의로 별무반(別武班)이 편성되는 좋은 기회를 만나 간청하여 별무반의 핵심 군대인 기병 중심의 신기군(神騎軍)으로 출전하였다. 1104년(숙종 9), 1107년(예종 2), 1108년(예종 3), 1109년(예종 4) 네 차례 출전하여 매번 선봉이 되어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을 사로잡고 물리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어 장연현령(長淵縣令)으로 청렴하게 공무를 잘 수행하여 안렴사(按廉使 : 각 도 관할 최고 지방관)가 조정에 보고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었고 회릉(懷陵), 대관(大官), 내고(內庫), 장야서(掌冶署)의 관직을 거치면서, 모두 직책을 잘 수행했다는 평판이 있었다.
차합문지후(借閤門祗候)로서 영주방어사(靈州防禦使)가 되었고 임기 만료 후 개경으로 돌아와 대부·사재주부(大府·司宰注簿), 군기승(軍器丞)을 역임하고 제릉서령(諸陵署令)에 있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행 도재고부사(行都齋庫副使)로 검교대자소보(檢校大子少保)의 관직이 더해졌다.
1150년(의종 4) 11월 19일, 병이 들어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품]
사람됨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과 말을 달려 격구(擊毬)하는 것을 좋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중략)... 6척(尺)의 당당한 몸으로 백옥처럼 한 점의 흠도 없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말단 벼슬에 머물고 말았도다. 그러나 천성이 물욕이 없고 낮은 관직과 박한 봉급에도 초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훌륭하지 아니한가. 형인 기거주 민수가 일찍 세상을 뜨고, 형제 자매 대여섯 명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형제 자매의 자식을 모두 자기 자식처럼 돌봤다. 어머니를 효성과 근실함으로 봉양하니 94세까지 장수하였다.
-『역주고려묘지명집성』「민영묘지명」내용 中 -
[참고자료]
『역주고려묘지명집성(譯註高麗墓誌銘集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