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인물

염극모

khf666666 2025. 4. 25. 00:10
반응형
SMALL

염극모(廉克髦, 1153∼1217)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 : 파주

[가족사항]

고조부 : 우보궐(右輔闕) 염현(廉顯)
증조부 :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
조부 :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태부소경(太府少卿) 염덕방(廉德方)
조모 : 의령군대부인(宜寧邵大夫人) 심씨(沈氏)
백부 : 염순약(廉純若), 염행약(廉行若), 염충약(廉忠若)
고모 : 염경애(廉慶愛 : 한림학사(翰林學士) 최루백(崔婁伯)의 부인), 염정애(廉貞愛 : 주부(注簿) 이자득(李自得)의 부인)
부 :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부상서(禮部尙書) 효문공(孝文公) 염신약(廉信若)
형 : 염극권(廉克鬈)
장인 :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김황백(金黃白)
사위 : 내시 소정주(邵廷冑)
아들 :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 염수장(廉守藏 : 초명 염후(珝))
※ 염극모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두 아들은 염극모보다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설명]

1153년(의종 7) 염신약의 둘째아들(막내)로 태어났다.
1174년(명종 4) 부친 신약은 급제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무신정권, 국난 등으로 인해 험한 일을 당할까 아들들에게 문자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삼척현위(三陟縣尉)가 되었다.
1176년 송림현위(松林縣尉)로 옮겼으며 임기가 차자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에 임명되었다.
1180년 강화도 마장별감(馬場別監)이 되었다.
1181년 장생령(掌牲令)에 임명되었다가 과거 두 현에서 치적이 우등으로 평가되어 예빈주부(禮賓注簿)로 승진하였다.
1186년 8월, 연해도(沿海道 :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 감세사(監稅使)가 되었다가 곧 당후관(堂後官)으로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고 마침내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7년(신종 즉위년)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부터 도관낭중(都官郞中)에 오르고 이에 복장(服章)을 하사받았다.
1205년(희종 1) 6월,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나주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가 2년 뒤 파직되었는데 『염극모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죄는 아니라고 한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나주 수령으로 책임을 묻고 파직된 것으로 보인다. 
1207년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다시 발탁되고 대부소경(大府少卿)으로 승진하고 또 계양부(桂陽府 :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수령이 되었으나 이 때부터 갈수록 세상과 부합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여러 차례 좌천당하자 비통해하며 날마다 술만 마셨다고 한다.
1213년(고종 즉위년)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
1214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에 임명되었다.
1215년 벼슬이 안남대도호부부사(安南大都護府副使) 병마간할 겸 권농사(兵馬幹轄兼勸農使) 조산대부(朝散大夫) 상서호부시랑(尙書戶部侍郞)에 이르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1217년(고종 4) 9월, 술로 세월을 보내 입은 옷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만큼 수척해져 병으로 관청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으며 무릇 베풀고 설치하는 것이 엄격하면서도 간편함을 바탕으로 삼고, 결백하고 청렴하며 부패하지 않음을 으뜸으로 삼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였다."
夙夜未甞有怠色凡所施設以嚴厲簡率爲本而潔淸不汚所主人皆稱

- 『염극모묘지명』 中 -

 

[참고자료]

『염극모묘지명(廉克髦墓誌銘)』
『염덕방처심씨묘지명(廉德方妻沈氏墓誌銘)』
『최루백묘지명(崔婁伯墓誌銘)』
『염수장묘지명(廉守藏墓誌銘)』

반응형

'중세사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경  (0) 2025.05.05
종우  (0) 2025.05.03
신덕  (0) 2025.04.17
상귀  (0) 2025.04.08
심몽룡  (0) 202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