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후
황자후(黃子厚, 1362∼1440)
조선 초기의 문신.
회덕황씨 혜의공파 시조.
본관 : 회덕
자 : 선양(善養), 노직(魯直)
호 : 송암(松巖)
시호 : 혜의(惠懿)
[가족사항]
증조부 : 가선대부(嘉善大夫) 호부전서(戶部典書) 황윤보(黃允寶) [회덕황씨의 시조]
조부 :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황연기(黃衍記)
백부 :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 황정(黃精), 황입(黃粒), 황종(黃粽)
부 :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보문각대제학 황수(黃粹)
모 : 증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
외조부 : 참지정사(叅知政事) 홍복규(洪復圭)
장인 : 판도판서(判圖判書) 한천동(韓天童)
부인 : 한양군부인(漢陽郡夫人) 청주한씨
아들 : 봉헌대부(奉憲大夫) 회천군(懷川君) 양도공(良悼公) 황유(黃裕) [태종의 부마 / 숙안옹주(淑安翁主)의 남편], 증 의정부 좌찬성 겸 대제학 황계광(黃繼光), 증 의정부 좌의정 황소광(黃紹光)
[사적 및 유적]
○ 황자후 묘소 :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산 20-1
[설명]
1362년(공민왕 11) 충청도 회덕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보임되었다.
1412년(태종 12) 3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으로 재임하던 중 과거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적 노비 문제 판정을 공정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처분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태장(笞杖)을 맞고 복직하였다.
1413년 8월, 형조좌참의에 제수되고 호패법(戶牌法)의 제정을 건의하였고 9월에 호패법이 실시되었다.
1414년 4월, 단오가 다가오자 호조참의(戶曹參議)로서 왕명을 받고 창포주(菖浦酒)를 만들었다.
5월,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의 한 집터에서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의혹 사건이 발생하여 현지로 파견되어 이를 직접 조사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혐의자를 석방하였다.
8월, 전라도 조운선(漕運船)의 침몰 사고로 군인 수백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태종이 크게 안타까워하며 조운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수도 지역의 녹봉용 전답의 절반을 지방으로 이전 지급해 세곡 수송을 줄이자는 방안과 배가 풍파를 피할 수 있게 운하 개설의 방안이 나왔는데 그는 경상도에 파견되어 도절제사와 함께 지방으로 전답 이관 및 운하 개설 지형 조사 실무를 맡아 활동했다.
10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백온(李伯溫), 총제(摠制) 유습(柳濕) 등과 함께 정조(正朝)를 하례(賀禮)하기 위해 관압사(管押使 : 말 조공시 파견된 사신)로서 명나라에 갔다.
12월,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개성 유후사 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를 겸하였다.
1415년 3월, 인녕부 윤(仁寧府尹)에 제수되었다.
5월, 왕명으로 남자아이 30명을 모아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7월, 모친의 병환으로 고향인 회덕현(懷德縣)에 있었기에 지방 수령직을 청하여 충청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이 제수된 시점에는 이미 모친의 병이 다 나았고 그가 의약(醫藥)에 밝아 오랫동안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를 겸하고 있어 지방직으로 나가면 몸이 불편한 태종을 돌볼 수 없음을 걱정하였다. 이에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 고쳐 제수되었고 동전(銅錢)을 사용의 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1416년(태종 16) 3월, 전의감의 책임자인 제조로서 부적절한 약재를 공적 보고 없이 이 사건을 외부에 유출하고 특정 인물들과 은밀히 논의하며 사건을 확대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장(杖) 80대를 맞고 충청도 회덕으로 귀양갔다가 5월에 풀려났다.
1421년(세종 3)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갔다. 명나라에 가기 전 하직 인사를 드리러온 그에게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은 이미 북경에 다녀왔던 그를 또 보내는 것은 그가 약품의 이치에 정통하기 때문이고 조선에 생산되지 않는 약재를 많이 구해 가지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1422년 2월에 명나라에서 돌아왔고 그 해 12월, 충청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23년 11월, 관찰사로서 환상미(還上米 : 조정에 상환해야 할 쌀) 15만 1천여 석을 독단으로 발급하고 현존한 양으로 기록 회계한 것이 사헌부에 의해 적발되어 고성으로 귀양보내졌다.
1424년 사면되어 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427년 9월,《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인쇄해 배포하기를 건의하였다.
1431년 8월, 한성부 윤에 제수되었다.
1432년 9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중추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1436년 12월, 동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1437년 침구(鍼灸 : 한방에서의 침과 뜸)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을 창설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케 하고 8월, 중추원 사에 제수되었다.
1438년 제주에서 나는 약재인 영릉향(零陵香)의 건조법이 미진한 것 같다며 영릉향을 잘 말려 쓰면 중국에서 들여오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상언하며 이를 국산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440년(세종 22) 8월 21일, 78세로 사망하였고 혜의(백성을 사랑하고 주기를 좋아함이 '혜',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선(賢善)함이 '의')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자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회덕황씨대동보(懷德黃氏大同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