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언
권언(權躽, 1421∼1467)
조선 전기의 무신·공신.
본관 : 안동(추밀공파)
시호 : 양정(襄靖)
[가족사항]
고조부 : 검교의정부좌정승(檢校議政府左政丞)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정간공(靖簡公) 권희(權僖)
증조부 :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세자이사(世子貳師) 길창군(吉昌君)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
조부 :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권천(權踐)
백부 :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호군(護軍) 권첩(權睫)
부 :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길창군 권첨(權瞻)
숙부 :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이조참의(吏曹參議) 권미(權眉), 충좌위호군(忠佐衛護軍) 권목(權睦)
동생 : 통정대부(通政大夫)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체(權軆)
외조부 : 현감 유우(劉祐)
모 : 정부인(貞夫人) 강릉유씨(江陵劉氏)
장인 : 대사헌 복여(卜予)
부인 : 정경부인(貞敬夫人) 면천복씨(沔川卜氏)
아들 : 어모장군(禦侮將軍) 권팽(權伻, 또는 권옥(權沃)), 사용(司勇) 권일(權佚)
[사적 및 유적]
○ 권언 묘소 :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 양정공 사우 : 충북 충주시 금릉동 507번지
[설명]
1421년(세종 3) 충주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4월, 단종이 모화관(慕華館)에서 베푼 무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0월, 군기주부(軍器注簿)로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기 일으킨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매복해 성문을 관리·감독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고 돌아왔을 때,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 3등인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으로 녹훈되고 복성군(福城君)으로 봉군되었으며 봉정대부(奉正大夫)로 가자되고 사복시 소윤을 제수받았고, 전지 1백 결·노비 7구·내구마 1필·백은 10냥·채단의 안팎 옷감 1벌을 하사받았다.
1455년(세조 1) 11월, 세종의 16남이자 사육신 박팽년의 사위이고 계유정난에 반대한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1456년 9월,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의 아내 귀금(貴今)과 딸 목금(木今)을 노비로 하사받았고 12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
1457년 2월,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이들의 외거노비(外居奴婢) 6구 하사받았다.
7월, 세조가 참여한 좌작진퇴(坐作進退 :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훈련)의 군사훈련 당시 위장(衛將)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군율을 어겨 심안의(沈安義), 이비(李埤) 등과 술을 마시는 형식으로 벌을 받았다.
1459년 3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460년 윤11월, 충청도처치사(忠淸道處置使)에 제수되었다.
1461년 10월, 행 상호군(行上護軍)으로서 위장(衛將)이 되어 풍양에서의 강무(講武)에 참여하였다.
1462년 9월, 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군사를 징집한 강무때 만강대장(彎强隊將)이 되었으나 10월, 서로평(西蘆平)에서 세조가 직접 사냥할때 자신이 이끌던 만강대(강궁(强弓)을 쏠 수 있는 군사들로 이뤄진 왕의 경호와 경비를 담당한 부대) 등이 활터로 뛰어 드는 바람에 대장직에서 교체되었다가 살곶이 들에서 펼쳐진 경기·개성부·충청도 군사를 징병한 강무때 중상대장(中廂大將)에 임명되었다.
12월, 명나라 황태후가 죽자 중추원부사로 진위 겸 진향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3년 7월, 충청도 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에 제수되었다.
1467년(세조 13) 11월 30일, 병으로 사망하였고 양정(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을 '양', 몸을 공손히 하며 말이 적은 것을 '정')의 시호를 받았다.
[평가]
무략(武略)이 있었고, 말이 적으면서 웃었다.
有武略寡言笑
- 『세조실록(世祖實錄)』 44권, 세조 13년 11월 30일 임진 3번째기사 권언의 졸기 中 -
[참고자료]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권근신도비(權近神道碑)』
『안동권씨대동세보(安東權氏大同世譜)』